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원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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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부님

활짝핀 미소에 시린 손 호호불며 다가와 잡은 손에 사랑이 흘러 넘쳐 거룩한 사비오의 눈물이 흐른다.
아코디언 건반 위에 춤추는 손길마다 우리 주 하느님의 거룩하신 말씀이 오묘한 선율 타고 마음 위에 내린다.
이국 땅 머언 곳에 내 한몸 뛰어들어 그리운 내 조국 그 산하 보고싶어 모으신 두 손길 위에 그리움이 비친다.
해맑은 하늘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빛나는 대지에는 아름다운 평화가어린 양 가슴마다 진실이 맺힌다.

원신부님

원신부님 약력

  • 1962. 3. 30 : Vincenzo Donati신부(한국명-원선오) 일본관구에서 한국 지원 입국
  • 1967~1980 : 동창회 지도신부 동창회신문 ‘벗’지 발행, 총동창회 ‘벗들의 큰모임’을 만듬
  • 1972~1980 : 살레시오중·고등학교 성무감(=교목-학생 생활지도 및 상담)신부
  • 1975년 : 학생들 사이에 ‘젠(GEN)의 운동’을 일으킴 1981 : 아프리카「케냐」선교사로 지원하여 한국을 떠남

GEN이란 「묵은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보자는 운동으로 새 세대 운동을 일이키자는 정신적인 혁명운동이다. 영어로는 New Generation 이라고 하며 약자로 GEN이라고 부른다. 젠의 기원은 북이태리 드리에스테시에 사는 ‘카라’라는 여성이 세계 제2차 대전 때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이웃과 형제, 자매, 동료, 나라와 나라사이에 그칠 줄 모르는 분노와 질투로 가득찬 것을 보고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가 먼저 앞장을 서야겠다고 깨닫고 그 젊은 세대들은 크리스챤 정신에 입각하여 암흑을 헤쳐 나가자는 정신적인 혁명운동을 일으킨 것이 시발점이다.

원선오(빈첸시오 도나티)신부의 생애(벗87호-1997년)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성가 한 구절을 유행가 부르듯 흥얼거리게 만든 주인공 원신부, 성가집에서 우리는 ‘원선오’라는 이름을 종종 대하게 된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이런 작곡가가 있구나 하는 흐뭇함에 젖기도 한다는데, 바로 그 주인공은 국적을 말하기 힘든 원선오(빈첸시오 도나티)신부다.

젊은이들의 음악적 영성을 불러일으킨 종교시간

원 신부가 한국에 처음 와서 눈을 뜬 새벽,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다고 한다. 이것은 원신부에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8년 간 일본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접할 수 없었던 반가운 것으로 마치 이탈리아 그의 고향 마을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원 신부는 믿는이들의 땅으로 자신을 이끈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활기찬 첫 햇살을 맞아 들였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로

원 신부는 1928년 이탈리아 중부 해변 도시 파노에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집안이었기에 소년기에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외삼촌이 살레시오 수도회 신부였던 관계로 또리노 발도꼬의 오라또리오에 들어가면서부터 살레시오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살이 되던 해에 첫 서원을 하고 수년 간 사목실습을 한 다음 1950년에 일본 선교사로 파견된다. 1954년 일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활동하다가 8년후인 1962년 한국으로 왔다. 20년의 한국 생활 중 대림동에서 일한 1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19년 동안은 광주 살레시오 중ㆍ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1982년 당시 총장 신부였던 돈 비가노의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대한 호소를 듣고 홀연히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그 때 원 신부의 나이 55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을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정작 자신은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만족할 수 있었다.

케냐에서 2년, 그리고 다시 수단으로...

원 신부는 ‘편하게 머무르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생각까지도 배제한 체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보다 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원 신부가 처음 일본으로 와서 그 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올 때, 그 당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막 전쟁을 치른 후의 혼란한 상황이었고, 아프리카에서도 역시 비교적 평온한 케냐에 안주하지 않으며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휘말려 있는 수단으로 간 것이다. 원 신부는 자신의 지난 세월이 일본에서는 아이들의 스승,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의 친구, 아프리카에서는 버림받은 아이들의 어버지의 삶을 살았다고 회상한다. 돈 보스꼬가 청소년들의 스승, 벗, 아버지임을 생각할 때 평생 돈 보스꼬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온 살레시안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청소년 가운데 현존하는 삶

“돈 보스꼬의 생각, 돈 보스꼬의 정신만이 저를 지탱하여 주는 지주입니다. 어느 나라든 어떤 상황이든 돈 보스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가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그 빛을 더 발한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이들의 생활 속에서만이 그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살레시오의 생명인 청소년 가운데의 현존, 즉 아씨스텐자(assistenza)를 철저히 실천했던 것이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성무감실에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소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청소하며 생활 속의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심어주었다. 이것은 학생과 같이 호흡하며 생활하는 돈 보스꼬의 교육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누구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하기 위해서 꼭 무슨 말을 하거나 무엇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간단한 방법은 그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원 신부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내려와 함께 생활하셨듯이 선생님도 아이들 가운데서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이는 자신의 옛 선생님들이 자기에게 교육했던 것을 그냥 따라하는 것일 뿐이라고 겸양되이 말한다. 원 신부는 그의 교육비법인 친절함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는데 그도 인간인 이상 때로는 인내심을 잃어버렸던적도 있다. 그 때 원 신부는 자신의 그러한 나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은 겸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는 실제로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 가운데서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는 그의 모습이 아마도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나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벗, 가난한 원신부

원 신부는 그의 생활 자체로도 학생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줬는데, 그것은 바로 가난한 삶이었다. 한 번은 광주 수도원 원 신부 방에 도둑이 든적이 있었다. 도둑은 그의 투철한 직업근성으로 방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훔칠만한 값비싼 물건이 하나도 없자 방주인 만 원망하며 나오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원 신부의 가난한 삶이 빚은 불쌍한 도둑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란 꾸러미나 겨울 속내의 같은 선물이 들어오면 원신부는 수도원 옆에 있었던 판자집을 찾아가 모두 나눠줬다. 또 지금은 다이어트 한다고 안먹는 청소년들이 있는데 원 신부가 가르칠 당시엔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때는 학생들이 여린 가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식당으로 데려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했을 때 우리가 이를 갖고 있다면 줄 수 있겠고 없으면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있으면서도 이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물건에 애착을 가지면 가질수록 청소년들과 이를 나누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그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것은 우리 마음과 활동을 제약한다.” 이것은 원 신부의 청빈에 대한 지론이다. 지금은 사랑에 목말라하는 아프리카수단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 원 신부는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성요한 기술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자립의 길을 도와주고 있다.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 인근에 몰려있는 약 2백만 명의 난민들은 보통 이틀에 한 번 옥수수나 단감자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성요한 기술학교의 난민촌 학생들에게도 학교에서 주는 점심 한 그릇이 유일한 식사다. 끊임없이 도움을 줘야 설 수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원 신부는 느낀 점이 많다. “줄 것이 없어도 달라고 달라고 하면 줄것이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줘도 줄 물건이 없다는 결과는 같아서, 겉으로 보기엔 아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저의 맘속에 이들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됩니다. 아이들도 그걸 느끼죠.” 한국을 떠난지 1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1997년 10월 4일 다시 아프리카로 향하는 원 신부의 바람은, 많은 동문들이 진정한 살레시안으로 살면서 살레시오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은 살레시오의 귀중한 일꾼들이고, 세상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돈보스꼬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평신도인 살레시오 가족을 기르는 데는 학교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 살레시오의 복음전파는 교육과 함께 수행하는 것인데, 한국에는 살레시오 남녀 중고등학교가 단 하나씩밖에 없어 아쉬움이 많다. 캐냐의 경우 순전히 졸업생들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살레시오 학교가 4군데나 있다면서 원 신부는 아프리카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한국에서도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살레시오 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나쁜 점이나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물음에 “지금 내가 한국에 발붙이지 않고 떠나서 한국의 나쁜 점을 말할 자격이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이런 원 신부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과 같이 하느님이란 목표를 향하면서 주님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의 도구가 되어 ‘네’라고 응답하는데....지금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도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된다면 기꺼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쉼 없는 열정을 뿜어낸다. 아프리카에서 남은 여생 가득히 돈 보스꼬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갈 원 신부의 훈훈함이 한국의 가을을 물들인다.

아프리카로 간 우리의 영원한 친구 원선오 신부 한국 방문

우리 벗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친구로 남아있는 원선오 신부님이 한국을 떠난 지 근 15년 만인 1997년 가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기쁨은 물론 우리 벗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기쁨이었다. 제6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살레시오 동문 총회를 준비하면서 몇몇 뜻 있는 벗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을 통해 원신부를 아는 모든 벗들과 살레시오 가족들이 만나서 하나되는 커다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원선오 신부 는 1962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이래 20여년 간 모교에서 성무감으로 일하면서 살레시안들에게는 물론 광주 시내 전체에 그 친절과 사랑이 널리 알려질 만큼 흐뭇한 사랑과 미소의 사목자였다. 수많은 벗들은 원신부의 낡은, 때론 군데군데 기운 검은 수단의 모습으로 비가오나 눈이오나 교문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말썽을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꼭 잡고 함께 울던 모습 또한 벗들에게 있어 늘 감동이었다. 또한 동창회 지도신부로서 ‘벗’지의 창간자요, ‘벗들의 큰모임’과 동문회 활성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55세이던 1982년 당시 총장이던 비가 노 신부의 아프리카 선교 계획에 동참하여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에서 새로이 시작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의 전반이 혼란스럽고 극한 대립만이 있는 수단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원선오 신부는 이번 방문 동안 호의를 베풀어준벗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전해왔다.

원신부님 주소

원선오 신부(Fr. Vincenzo Donati, SDB) ETIOPIA Catholic Church Salesian of Don Bosco PO BOX 180 GAMBELA-ETIOPIA(AF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