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카폰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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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폰신부님

살레시오 수도회의 한국 초청은, 6.25사변 당시 미군종신부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1951년 장렬하게 전사한 카폰(E.J Kapuan) 신부의 기념 사업을 한국 현지에서 시작하기로 미군종신부단이 발의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종신부단은 이 사업을 미국계 주교인 현(하롤드 헨리 Harold W.Henry)주교에게 일임했고, 현주교는 이 정신에 적극 찬동하여 적절한 사업을 물색하던 중 한국에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사업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이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당시 현주교는 광주교구 교구장 서리로 재직하면서 전쟁후의 난민구호와 복음전파 사업에 진력하고 있던 중이었고,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여망은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터를 마련 해주고 전쟁의 상처를 하루 속히 치유하는 일이었다. 이때 현주교는 이탈리아의 또리노에서 창설된 살레시오 수도회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청소년을 위한 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음을 알고, 1953년 초 이미 일본에 진출하여 있는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장(탓시나리)신부와 만나 살레시오 교육수도회의 한국 초청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카폰신부님

카폰신부님 약력

  • 1916. 4. 20. : 미국 켄자스주 펠센에서 출생
  • 1940 : 사제 서품
  • 1944~1946 : 워싱턴 D.C. 가톨릭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 1948. 9 : 군에 재입대
  • 1950. 7. 11. : 한국전쟁에 종군
  • 1950. 9. 2. : 동성훈장 받음
  • 1950. 11. 2. : 중공군 포로가 됨
  • 1951. 5. 23. : 북한의 벽동(碧洞) 포로수용소에서 사망

카폰 신부는 1916년 4월 20일 미국 캔사스주 펠센시 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5월 9일 세례를 받고 아버지「에노스카론」씨와 어머니「엘리자벹」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고향 펠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콘칩숀」대학에서 한때 고전 문학을 연구하였으며 철학도 공부하였다. 그는 20세 되던 1936년 미주리 주「쎈루이 켄릭」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로서의 수업을 마친 후 1940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펠센교회 보좌신부를 역임하다가 1944년에 군목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해외 파병을 명령받아 인도북부 전투지휘본부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 대위로 승진하였고 1948년에는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50년 7월 11일에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된다. 그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금성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며 군종신부로서 사명을 다하다가 1950년 11월 2일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근6개월 동안을 괴뢰군의 온갖 고문과 학대 속에 신음하면서도 전우들의 구원사업에 최선을 다했으며「가시철사를 쓴 그리스도」라는 별칭을 들을 만큼 주님의 종으로서 충실한 생활을 하다가 1951년 5월 23일 북한 벽동에 있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장렬한 일생을 마쳤다. 1953년 미국「캔사스」주 위치다의「성마리아」 대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올림으로서 그 평생의 위업은 만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재 에밀 카폰(Emil Kapaun, 1916~1951) 신부의 시성 추진 운동이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일고 있다. 카폰신부의 시성추진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세인트루이스 대교구의 패트릭 몰리 몬시뇰이며, 카폰신부의 신학교 동창인 몰리 몬시뇰은 미국 군종 대교구와 카폰신부의 출신지인 캔자스 주 위치타 교구와 함께 추진 운동을 펴면서 카폰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례 수집에도 나서고 있다. 몰리 몬시뇰이 한국전쟁 당시 카폰신부의 영웅적인 삶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것은 지난 1957년 위치타에서 카폰신부를 기억하며 그의이름을 딴 한 고등학교(?)를 바치는 행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카폰 신부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행사장에서 한결같이 카폰신부가 한 일에 대해 대단한 존경을 표시했었다고 몰리 몬시뇰은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다가 몬시뇰은 최근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카폰신부의 생활을 기록한 한 군종회보를 읽고서는 카폰신부에 대해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몬시뇰이 수집한 증언들에 따르면, 카폰신부는 수용소 포로들이 이질 병으로 고생하자 습격대를 조직하거나 때로는 혼자 몸으로 배급소에 몰래 들어가 필요한 음식이나 물품들을 구해주곤 했다. 자신에게 먹을 것이 돌아올 때도 다른 포로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화장실로 부 축해 용변을 보도록 도와주었으며, 더러워진 옷가지들도 깨끗이 빨아주는 등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뿐 아니라 카폰신부는 절망에 빠져있던 포로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준 화신이었다.

한번은 개신교 군목이 좌절에 빠져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동료 포로들의 눈에 띄었다. 포로들은 그 목사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실패했고, 결국에는 카폰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폰신부는 “너희 개신교인들은 정말 나쁜놈들이야!”라는 한마디 말로 목사에게 삶 의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다. 이렇게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많은 포로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카폰신부는, 그러나 평안북도 벽동의 포로수용소 생활 몇 달만에 불치의 병에 걸려 1951년 5월 23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벽동 포로수용소에는 활기가 넘쳤다. 수용소 사람들은 카폰신부를 통해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카폰신부가 있었던 벽동 포로수용소의 생존자 수는 다른 포로수용소보다 7배나 많았다고 한다.

한편 카폰신부의 생애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1956년 신학생 시절에「종군신부 카폰」(가톨릭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정 대주교는 1991년 개정판 역자 후기를 통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스스로 종군을 지원하여 전선에 나와 불꽃튀는 전투 중에 포로가 된 카폰 신부는 “얼마든지 도망할 수도 있었지만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일부러 포로가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정 대주교는 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전우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쏟음으로써 그는 「가시철사를 쓴 그리스도」라는 숭고한 자화상을 형성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