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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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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주교

현대주교는 한국 살레시오수도회 최초의 협력자이며 은인이자 당시 가장 절실했던 한국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 살레시오 수도회를 이 땅에 초청하신 분이다.
1953년 당시 현대주교는 광주교구 교구장 서리로 재직하면서 전쟁후의 난민구호와 복음전파 사업에 진력하고 있던 중이었고,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여망은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터를 마련 해주고 전쟁의 상처를 하루 속히 치유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살레시오 수도회의 한국 초청은, 6.25사변 당시 미군종신부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가 1951년 장렬하게 전사한 카폰(E.J Kapuan) 신부의 기념 사업을 하기로 미군종신부단이 발의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주교는 이 정신에 적극 찬동하고 적절한 사업을 물색하던 중 한국에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사업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이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고, 이때 현대주교는 이탈리아의 또리노에서 창설된 살레시오 수도회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청소년을 위한 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음을 알고, 1953년 초 이미 일본에 진출하여 있는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장(탓시나리)신부와 만나 살레시오 교육수도회의 한국 초청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일본 동경 실업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고 있던 이탈리아 국적의 아르키메데 마르리(Archimede Martelli-한국명 마신부)신부가 당시 총장이 신 Ziggiotti Rento신부의 명으로 살레시오 수도회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파견되는데, 그는 38세의 나이로 정열적으로 청소년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마신부는 굳은 결의를 앞세우고 현해탄을 건너 1954년 11월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의 가방 속에는 한국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청사진과 학교 건설을 위한 설계도가 들어 있었다.

현대주교

살레시오수도회를 한국에 초청한 현대주교님의 약력

  • 본적 : 미국 미네소타주 노스필드
  • 성명 : 하롤드 헨리(Harold W.Henry)
  • 생년월일 : 1909년 7월 11일생
  • 1932년 : 미국 성 골롬반 신학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
  • 1933년 : 한국에 도착하여 6개월간 한국어 연수
  • 1934년 : 전남 나주군 노안 천주교회 보좌신부 피임
  • 1941년 : 일제치하 8개월간 옥고생활
  • 1942년 : 미국으로 강제 송환
  • 1943년 : 종군 신부로서 종전시까지 구라파지역에서 활약했음 미국방성에서 동성훈장 받음
  • 1945년 : 성 골롬반 신학대학 교수피임
  • 1947년 : 한국에 재입국 천주교 광주교구장 대리 사무관장
  • 1950년 : 천주교 광주교구 교구장 서리 피임
  • 1954년 : 천주교 광주교구 교구장 피임
  • 1957년 : 천주교 광주교구 주교로 피명
  • 1962년 :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여 천주교 광주교구 대주교로 임명

현(H.W.Henry, 玄海 하롤드) 대주교는 1909년 11월 11일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출생하여 1932년 12월 21일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대학을 수료한 뒤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과 동시에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중국으로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임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933년 10월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 후 헨리 신부는 1934년 전남 노안 본당 보좌를 거처 이듬해 나주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부터 8개월 간 일제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른 다음 이듬해 8월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곳에서 군종신부와 골롬반회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던 헨리 신부는 1947년 10월 다시 한국에 입국하여 2년 동안 광주교구장(지목구장) 대리로 활동하였고, 1950년 7월에는 제5대 광주교구장 서리로 임명되고, 이어 1954년 10월 정식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7년 1월 21일 광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주교로 승품되어 5월 11일 미국 보스턴에서 누미디아(Numidia)의 투비넨시스 명의 주교로 주교 성성식을 갖고 귀국하였다. 헨리 주교는 한국 교계 제도 설정 직후인 1962년 3월 25일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1971년 6월 28일(국내 발표는 7월 14일), 제주 감목대리구를 ‘제주 지목구(濟州知牧區)’로 설정하는 동시에 제3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재임하던 현(H.W.Henry, 玄海 하롤드) 대주교를 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제주 천주교회 10년사에서 발췌 235~238쪽)

1971년 7월 18일. 헨리 대주교가 제주 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전주교구장으로 재임하던 한공렬(베드로, 1913~1973년) 주교가 제4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은 헨리 대주교가 제주 지역교회의 미래를 위해 광주 대교구로부터의 분리를 건의하는 동시에 자신이 제주의 사목을 담당할 수 있게되기를 바라던 원의를 수용한 것을 의미한다.
1976년 3월 1일 제주 신자들은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날 오전 8시 40분 아침 주교관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기도하던 지목구장 헨리 대주교가 심장 마비로 선종한 것이다. 헨리 대주교의 영결식은 3월 4일 제주 중앙 성당에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주례로 엄수되었고, 1만여 명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가운데 황사평 교회 묘역에 안장되었다.(가톨릭시보-제775호)